진정한 친구가 몇사람 있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였다. 따라서 인간은 개인에서 벗어나 사회에 연관하므로서 사회적 적응력을 높이고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인간 사이에서 사회적 감정이 형성되고 친구라는 낱말이 생활속에 침투되고 덕과 함께 사회생활의 부분을 이룬다.



친구라는 낱말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정감이가며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그 개념 설정이 수월치아니하고 그 범주를 읽기가 쉽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주변에 무수히 있을것 같으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실체로서 사람에 따라 그 형체와 체취를 식별하는 방법이 다를것이며 그 잣대 또한 각양각색일것이다.



옛글에도 [상식 만천하 지심능기인] 라하여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많은데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사람이나 될것인가 하고 자문한 글귀를 볼수있다. 즉 얼굴을 아는것보다 마음을 알아야 참다운 벗인데 과연 그런 벗이 몇사람이나 될것인가 라고 하지않았는가.



친구라는 개념은 죽마고우니 총죽지교니하여 오랜세월 정답게 사귀어온 벗을 뜻하고 있는데 이는 통속적인 개념 해석이고 근대사회에서는 그 풀이가 다양화 되어야 할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교류가 극대화되고 세계가 일일 생활권에 있는 현실에서는 그 해석도 적극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간, 사업자간, 학연간의 개념과 전통사회의 개념으로 대별 하여야할것이다.



정치인은 속성상 영원한 친구가 있을수 없고 외국과의 교역에 있어서는 친구라는 개념이 이해 관계에 따라 달라지게되며 학연간에는 일정한 기간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달라질수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서민사회에서 통칭되는 친구의 개념은 전통사회의 해석을 준하는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친구의 개념에서 과연 우리에게는 몇사람의 친구를 가지고 있는것일가.



사회적 거리의 척도에 따라 그 수가 결정될것이나 그 수는 추상적일수 밖에없다. 왜냐하면 자기자신의 평가는 객관성이 없기때문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친구를 친구로 생각하기 마련이고 같은 일터에서 일하는 동료는 모두 자기 친구로 착각 하기쉽다.



이를 풍자한 글에 이런 글귀가 있다. [주식형제 천개유 급난지붕 일개무] 술먹을 때는 많은 친구가 따르나 위급하고 어려울때는 친구가 없다, 라고 하였으니 주관적인 생각은 틀렸다는것을 깨우치고 있지 아니한가. 여기에 고사 하나를 소개하므로서 친구라는 개념 설정에 기여코자 한다.



이조 영조조에 있었던 일로서 어느날 양반댁 아버지가 자식에게 따져 묻기를 너는 학문에 열중하여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하거늘 친구들과 어울러 다니며 술타령만 하고 있으니 언제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 할것인고, 하고 힐책 하자 그 아들 대답 하기를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데에는 학문도 중요 하지만 친구를 사귀는것도 못지 않게 중요 하다고 생각하여 틈틈이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음을 아뢴다.



그러자 그 아버지 대노하여 말하기를 그럼 과연 너의 진정한 친구가 몇 사람이나 되기에 친구 타령이냐고 되묻자 사오십명 된다고 대답 하였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 제안하기를 그렇다면 너와 나의 친구들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확인해 보기로 하자.



만일 너의 친구가 많다면 너의 행하는바가 옳을것이고 적을경우 너의 행위가 틀렸음인 즉 학업에 전념하여야 할것이다, 라고 다짐하고 확인에 들어간다. 방법을 상의한후 아들을 먼저 집안에 숨겨 두고 거짓으로 아들의 죽음을 부고하고 치상 준비를 서두는척 하였으나 그 아들의 친구는 한사람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질 않는가.



그를 확인한 아들은 탄식 할수 밖에. 같은 방법으로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訃告를 돌리니 순식간에 통곡 소리 온 마을에 퍼지고 아버지의 친구들은 이마을 저마을에서 노구의 몸을 무릅쓰고 상막으로 모여 들지 않는가.



너무나 판이하게 전개되는 이광경을 본 그 아들 실신 하기에 이른다. 원근에서 모인 아버지 친구들에게 전후사정을 말씀드리고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내니 그의 아버지의 기지에 감탄 하였다 한다.



이런 일이 있은후 그의 아들은 그간의 허황된 생각을 反省하고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학문에 열중하여 증광과에 及第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그의 형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술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 실학의 대가가 되었다.



특히 천문 지리 의학 율산 경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선공가감역으로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저술에 몰두 하였다 한다. 위 글에서 보았듯이 우리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는듯한 착각속에 살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이 엄숙한 현실 앞에 우리는 친구가 많다고 자부 할수있겠는가. 진정한 친구 셋이 있으면 말년의 생활에 권태를 모르고 지낼수 있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 세 사람의 진정한 친구가 있다고 큰 소리칠 사람은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정승집 개가 죽으니 문상객이 쇄도 하더니 막상 정승이 죽으니 문상객이 없었다는 구전은 과연 헛된 말이 었을가. 친구라는 낱말은 언제나 정답다. 그리고 많은 친구 사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를 쉽게 얻을수 있겠는가.



친구를 얻기 위하여서는 십년 이십년 자기 인격도야에 힘쓰고 신의로서 벗을 대하고 자기 희생이 전제되어야 비로서 진정한 친구를 얻을수 있을것이다. 언제 부터인가 벼락 출세하여 감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그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은 친구 일 수 없다.



더더욱 졸부들에 아부하는 몰골들은 졸부에 앞서 비굴한 화신일 뿐이다. [노요지마력이요. 일구견인심이니라] 는 글귀를 보라.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수 있고, 오랜세월 지내야 사람의 마음을 짐작 할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진리이고 사람들의 속성이다.



지금 허영과착각속에 거들먹거리는 군상들이 있다면 그들과 그들의 후세들을 위하여 과대망상의 허상에서 깨어나라. 친구는 먼곳에 있는것이 아니고 자기의 덕과 희생정신에 비례하여 주변에 있음을 명념하라.